주린이어도 괜찮아…알아서 선택해주는 美 401k 퇴직연금

401(k) 수익률 높인 마법...적격디폴트상품(QDIA)

"미국도 연금보호법(Pension Protection Act)과 적격디폴트상품(QDIA) 제도가 도입되기 전엔 현금 투자가 안전하다고 여겼죠. 지금은 장기적으로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가지는 게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걸 확인했습니다."(케빈 머피 프랭클린템플턴 미국투자전용부문 부사장)

미국자산운용협회(ICI)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인 퇴직연금 계좌인 401(k) 자산의 70%는 주식에 투자하고있다. 가입자의 70%가 TDF(타겟데이트펀드)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401(k)는 총자산이 약 9조달러(1경2400조원)에 달하는 세계 최대 연금시스템이다. TDF 등 실적배당형 상품 투자 비중이 높은 덕에 401k 운용수익률은 지난 20년(2001~2020년)간 연평균 8.6%에 달했다.

TDF는 은퇴 시점까지 남은 기간에 따라 주식과 채권의 비중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대표적인 은퇴 준비형 펀드다. 가입자는 은퇴 목표 연도만 선택하면 초기에는 주식을 많이 담고,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채권 등 안전 자산 비중을 늘리도록 설계돼 있다. 쉽게 말해 20대 투자자는 주식 비중을 90%로 두고, 은퇴가 가까운 60대는 주식 비중을 절반(평균 44%)으로 줄인다. 투자 지식이 없어도 자동으로 위험 자산과 안전 자산 비중이 조절되는 구조다.

2006년 연금보호법과 QDIA 도입 이후 TDF가 대표적인 퇴직연금 투자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미국의 QDIA에는 예적금과 같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은 아예 없다. 고용주가 디폴트옵션 상품을 결정하는데 TDF나 자산배분형 펀드를 선택한다. 미국자산운용협회(ICI)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약 85%가 기본 옵션으로 TDF를 채택했다.

반면 한국의 확정기여형(DC형) 디폴트옵션에는 TDF뿐 아니라 은행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도 대거 포함돼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는 가입 초기부터 스스로 여러 투자 상품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원리금보장형 상품이 존재하는 국가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미국 금융투자전문가들은 미국과 한국의 퇴직연금 수익률 격차는 개인의 투자 실력이나 지식 차이가 아니라 투자 결정 주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제프리 산젠바허(Geoffrey Sanzenbacher) 보스턴칼리지 퇴직연구센터 연구원 겸 경제학 실무교수는 "아무런 투자 지식이 없는 일반인의 경우 선택지가 많을수록 대체로 가장 보수적인 결정을 내린다"며 "여기에 한국은 선택지에 원리금보장형 상품이 포함돼 있어 가입자 대부분이 해당 상품을 고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명두(크레이그 리) AON 자산관리 시니어 컨설턴트는 "미국 근로자는 선택 부담이 없고 자금은 자연스럽게 주식 등 위험 자산으로 흘러간다"며 "디폴트옵션 제도 자체가 투자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고용주들이 TDF를 기본 옵션으로 적극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배경에는 연금보호법의 면책 조항이 있다. 이 조항은 디폴트옵션이 설정된 상품에서 운용 손실이 발생해도 기업이 투자자의 지시가 없었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했다.

그 결과 미국 401(k) 계좌의 연금 자산에서 TDF와 주식 비중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특히 20대 가입자의 90% 이상은 주식 비중을 8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동훈 앰플리파이ETFs 아시아시장 총괄 상무는 "국내에는 미국처럼 면책 조항이 없어 기업이 책임을 피하려 선택권을 근로자에게 떠넘길 수 밖에 없는 구조"라며 "국내에서도 고용주가 TDF를 기본 디폴트옵션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미국과 유사한 법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첫 단추만 잘 끼우면…방치와 게으름이 만든 연금 백만장자"
제프리 산젠바허 보스턴칼리지 퇴직연구센터 연구원·경제학 교수 인터뷰


"첫 단추가 노후 자산의 성패를 가릅니다. 미국 퇴직연금 제도의 성공 비결은 바로 그 첫 단추를 실적배당형 상품인 'TDF(타겟데이트펀드)'로 설정한 데 있습니다. 인간의 '게으름'을 활용한 이 단순한 설계가 연금 백만장자의 길로 이끄는 셈이죠."

제프리 산젠바허(Geoffrey Sanzenbacher) 보스턴칼리지 퇴직연구센터 연구원 겸 경제학 실무교수는 머니투데이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미국은 근로자가 401k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순간부터 별도의 지시를 내리지 않는 이상 대부분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에서 TDF에 자동으로 투자된다. 즉 근로자가 직접 상품을 고르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TDF가 선택·운용되는 구조다.

TDF는 은퇴 시점까지 남은 기간에 따라 주식과 채권 비중을 자동 조정하는 대표적인 은퇴 준비형 펀드다. 가입자는 은퇴 목표 연도만 선택하면 초기에는 주식 등 위험 자산을 크게 가져가고 은퇴 시점이 다가올 수록 채권 등 안전자산의 비중을 늘리도록 설계돼 있다.

산젠바허 교수는 "일반 투자자들은 디폴트로 설정된 TDF를 원치 않으면 직접 '옵트아웃(해지)'해야 하지만 대부분 게으름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 첫 설정값을 그대로 유지한다"라며 "이러한 구조가 미국 퇴직연금의 높은 주식 투자 비중으로 이어진다"라고 설명했다.이른바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넛지(nudge) 전략'(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환경·설계를 통해 최선의 선택을 유도하는 방법)을 활용한 것이다.

TDF의 효과는 사회초년생에게 특히 크다. 미국 자산운용협회(ICI)에 따르면 20대 가입자 10명 중 9명 이상이 주식 비중을 8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TDF는 20대 투자자의 경우 주식 비중을 90%, 채권 등 안전자산 비중을 10% 안팎으로 설계하기 때문이다.

산젠바허 교수는 "투자자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투자 결정을 내리지만 TDF 상품 덕분에 가입자들이 의도치 않게 훨씬 공격적인 포트폴리오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보스턴칼리지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50~78세 DC형 퇴직연금 가입자 1000명이 희망하는 주식 투자 비중은 평균 37%에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퇴직연금 계좌를 분석한 결과 자산의 48% 이상이 주식에 투자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젠바허 교수는 "이는 은퇴 시점이 다가와도 주식 비중을 절반 수준(평균 44%)으로 유지하도록 설계된 TDF 영향이다. 결과적으로 TDF가 투자자들이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자금을 굴리지만 이러한 괴리율은 수익률에 오히려 긍정적이다"라고 설명했다.

높은 수익률을 위해서는 주식 비중을 크게 가져가는 것뿐 아니라 이를 장기간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ICI 통계에 따르면 2022년 1~3분기 팬데믹 기간 변동성 장세가 이어졌을 때도 DC형 퇴직연금 가입자 중 자산 배분(주식·채권 비중)을 바꾼 사람은 7.4%에 그쳤다. 대부분 가입자가 주식 비중을 꾸준히 유지한 것이다.

산젠바허 교수는 이에 대해 "투자 지식이 없는 일반인에게는 주식 시장이 폭락하더라도 직접 계좌를 열어 주식 비중을 줄이는 건 큰 부담이자 번거로운 일이다. 대부분 TDF로 자금이 굴러가게 둔다"라며 "이러한 게으름과 방치가 오히려 수익률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말했다.

"연금 백만장자 친구들 수두룩"…50대에도 주식 비중 높이는 미국

"주변에 연금 백만장자 친구들을 보면 정말 부럽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주식 비중을 조금 더 높여 수익률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빨리 은퇴하려고 합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워싱턴 스미스(52)는 기자에게 "현재 월급의 20% 이상을 매달 401(k)(미국의 확정기여형 기업연금) 계좌에 넣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저도 예전에 중도 인출만 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은퇴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퇴직연금을 공격적으로 운용하는 5060 세대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증시 활황으로 쌓인 학습 효과가 세대 전반의 투자 성향을 바꿔놓은 것이다. 더 많은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유입되면 증시가 강세를 보이고, 이른바 '연금 백만장자'가 늘어나는 선순환이 형성될 것으로 연금 전문가들은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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